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커뮤로그

실종, 그 뒤에

나 하늘로 돌아가리라.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,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.

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,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.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, 아름다왔더라고 말하리라

천상병-귀천

 

목마르다, 배고프다.

 

 머릿속에는 이 둘 외에는 어느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. 지하로 꺼져 버린 이 상황에서, 내 손 안에는 단검 한 자루와 다 먹어버린 음식 찌꺼기만 싸늘히 남아 있을 뿐, 더 이상 먹을 것도 마실 것도 무엇도 없었다. 추락 이후, 누군가 자신를 찾으러 올 거라 여겼다, 어제 그랬듯, 누군가 혹은 누군가들이, 우릴 찾으러 와 줄 것이다. 그렇게 믿고 있은 지 셀 수 없이 긴 시간이 흘러갔다. 지하에 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아, 며칠 밤낮이 지났는지 모르겠다. 아니, 어쩌면 몇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. 처음에 내 머릴 지배했던 다른 잡생각들은 사그라들었다, 다만 본능적인 욕망만이 살고 싶다 열심히 머릿속에서 아우성대는 중이었다. 다르게 말하자면, 이성을 잃었다고 표현해야 할까. 나가고 싶어 발버둥쳐 보아도, 혼자서는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는 높이에 이곳저곳 돌아다니기조차 힘들다. 이대로라면 굶어 죽을 판국이었다. 역시 굶어죽어버리기 전에, 그냥 깔끔하게 죽어버려야 할까, 손 안에 쥔 칼을 움켜쥐었다. 그때,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한 줄기 동앗줄마냥, 인기척이 느껴졌다. 좀비일까? 아니면 나를 찾으러 나온 사람일까? 어느 쪽이든 이제는 상관이 없었다. 내가 그들의 인기척을 들었듯, 그들도 내 인기척을 들었겠지. 

 

"여기!! 생존자를 발견했습니다!!"

 

 사람이다, 분명히 처음 듣는 목소리에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분명히 그건 사람이었다. 어쩌면 반가운 그 목소리에 대답할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은 채, 멍하니 앉아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. 그는 제게 물과 식량을 나누어 주더니 이것저것 신원을 묻더니만, 내 이름을 듣고는 환히 웃으며 묻지도 않은 상황을 주저리 주저리 떠들어 대기 시작하였다. 길고 장황한 설명에, 그 사람은 고개를 갸웃하며 조심스레 내게 물었다. 

 

"혹시 다른 분들은 못 보셨습니까? 이름이...텐 씨나 돌 씨? 이쪽 근방에서 실종 된 거라고 들었습니다."

 

 정신이 퍼뜩 들었다. 그러고 보니, 제 연인도 이곳 어딘가에 실종되어 있을 것이다. 그렇다면 그도 곧 구출되겠지, 입가에 며칠만인지 모를 미소가 걸렸다. 결론적으로는 모두 잘 된 것이다. 이제는 식량이나 좀비를 걱정하며 하루하루 목숨을 걸 일도 없을 것이다. 멋진 해피 엔딩이었다. 앉아 멍하니 빵쪼가리를 뜯어 입 안에 넣었다. 딱딱하고 맛없는 그 느낌에 목이 막혔지만, 어쩐지 느껴질 리 없는 단맛이 혀 끝을 맴돌았다. 느릿느릿 그 빵을 씹으며 옆에서 들려오는 수다스런 목소리를 한 귀로 흘려들은지 몇 분이나 되었으려나, 저 멀리서 어느 처음 들을 여린 목소리가 들려온다. 무어라 무어라 외쳐 대는 소리를 마찬가지로 흘려들어 버리었다. 

 

"...시체 세 구를 발견... 죽은 ...얼마 안 된... "

 

 그러나 그 목소리가 읊어 댄 어느 단어 몇 가지는, 그의 귀를 후벼 파 들어가 뇌리에 꽂혀 버렸다. 여기에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시체라니, 분명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많았다. 그렇지만 내려오는 싸늘한 한기가 어쩌면 이라는 상상하기도 싫은 가정을 내게 속삭이고 있었다. 그 상상키도 싫은 가정이 그저 헛생각임을 증명하기 위해 그대로 툭, 가볍게 말을 뱉어 보였다. 

 

 "시체 세 구? 뭐 누가 죽기라도 했나보네"

 

 "예? 아 근방에서 실종자일지도 모를 시체를 발견했답니다. 시체로 발견되는 일이 흔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, 아무래도 죽은 지 얼마 안 되 보여 신원 확인 중에 있습니다."

 

 불안하다. 아까보다 한층 더 서늘하게 온몸을 감싼 한기는 스멀스멀 나를 먹어 가는 절망감에 힘을 더 실어 주고 있었다. 분명 그 시체가 제 애인일 리 없다고 입으로 끊임없이 중얼거리면서, 그럴 리 없다고 수없이 부정하면서, 제 손의 남은 빵조가리를 바짝 마른 입으로 다급하게 씹어 삼켜 넘긴다. 혀끝에서 밀려오던 희끗한 단맛은 어느새 사라져 입 안 가득 씁쓸한 쓴맛만 퍼져 나가고 있었다. 

 

"일단 시체는 성인 남성 셋으로 세 구 모두 피로 잔뜩 젖어 있으나 좀비가 되었거나 좀비에게 습격당해 살해당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. 하나는 상반신 쪽이 뭉개져 있고 신원을 알 수 없으며, 피부가 어두운 편이랍니다. 하나는 검은 머리의 장신으로, 나잇대가 조금 있어 보였습니다. 머리에는 총상이 있다고 하는군요. 그리고 나머지 한 구는..."

 

 이어지는 설명에 조금씩 다급해졌다. 입안이 더 타는 듯 바짝바짝 말라 들어간다. 혀는 소리없는 비명을 질러 댄다. 

 

 "갈색 머리로 된 시신으로, 스스로 목을 졸라 자살한 것으로 추정됩니다. 소지품으로는독약이 발견되었으며..."

 

 아, 그리고 부정하던 가능성은 현실로 다가왔다. 일어날 리가 없다고 일어나선 안 된다 끊임없이 되뇌이던 그 일은 결국 일어났다. 간신히 붙잡던 이성의 끈은 제 손바닥을 유유히 빠져나와 허공을 향해 떨어져버렸다. 입안 가득 퍼지던 싸늘한 쓴맛도 희끗한 단맛도 타오르던 갈증도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. 언제나 늘 무표정만을 유지했던 그는 마지막 제 죽음의 순간까지도 찡그림 하나 없었다. 그럼에도 그의 목에 남겨진 흔적에 보여지는 고통스러웠을 죽음에 더는 제정신을 잡을 수가 없었다. 허탈해진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간다. 

 

 "————————————!!!!!"

 

 그뒤로 시간은 날 버리고 하염없이 지나간다.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. 아마 날 구해준 둘이 이곳으로 데려와 주었겠지. 고개를 돌리니 사용되지 않은 소독약 하나와 사랑스러운 달링이 남긴 책, 칼 한 자루가 보인다. 텁텁해진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키며, 천천히 책을 집어 들어 한 장씩 넘겨 본다. 정말로 재미없는 책이다. 원래라면 거들떠 보지도 않았을 그 책을 넘긴다. 넘긴다. 하염없이 넘긴다. 책장이 젖어간다, 스멀스멀 그 재미없는 하얗고 검은 글자열 사이는 이제는 볼 수 없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눈물에 흠뻑 젖어 간다. 뚝뚝 흐르는 그 슬픔에 종이조차도 울어 찢어져가지만, 개의치 않고 천천히 장을 넘긴다.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. 넘기면서 보이는 작게 찢어진 흔적, 희미하게 눌린 책갈피 자국과 넘겨가며 접힌 종잇자국이 내 손을 스쳐가는 것이, 그러면서 그 종이 위에 다시 내 흔적을 남겨가는 것이 그것이 중요한 것이라며 눈물로 흐릿해진 눈을 비벼가며 한 장 한 장 종이를 넘겨간다. 새까만 밤하늘에 새하얀 햇살이 쏟아지며, 누군가는 더 이상 없는 새로운 날이 밝아온다. 동시에, 마지막 장이 넘겨져 책이 덮인다. 뒷표지의 바코드를 희미하게 쓸어 보이고는, 책을 옆에 조심스레 내려 두었다. 

 

 말라버린 입 안에 소독약을 털어넣고는 입안 가득 젖어가며 타오르는 목구멍 끝에서 한마디를 읊조려 보았다. 그리고는 제 손 안의 칼을 집어, 제 목을 겨누었다. 부들부들 떨리는 손은 제 죽음을 거부하고, 제 목구멍은 타올라가며, 제 눈은 자기의 아픔을 토로하며 하염없이 소리지른다. 흔들리는 제 팔을 다잡고 눈을 부릅뜨고는 입에서 뚝뚝 떨어지는 침을 간신히 삼켜 넘긴다. 날카로운 칼 끝은 그의 목을 가로질러, 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뜨거움이 번져나간다. 당장이라도 제 손의 흉기를 던져 버리고 싶은 마음을 눌러 내리고, 고통에 살려달라 내지르는 제 목 안으로 더 깊숙히 칼을 찔러 보인다. 고통스럽다, 고통스럽다 눈앞이 희게 번쩍거리고, 주마등처럼 인생이 스쳐지나간다. 재미없는 인생의 쓸쓸히 마지막으로 말을 읊조리는 자기만이 보인다. 탱그랑, 칼이 떨어지고, 시야가 흐려진다. 귀 끝에 희미하게 제가 뱉어낸 마지막 문장이 들리운다. 

 

 

 

 달링 조금만 기다려, 내가 곧 따라갈게

 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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